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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학의 길

파과, 죽음을 업으로 삼은 자의 삶 되묻기

by Macan 2025. 5. 16.
“죽음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마주해야 비로소 삶을 생각하게 되는가.”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것을 독자에게 던져줍니다. 이 작품은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강요하는 일종의 철학적 장치입니다.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킬러가 되어 죽음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조각’이라는 여성 인물은, 단순한 픽션의 주인공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실존 문제를 상징하는 하나의 거울입니다.

살인을 수행하는 그녀는 감정을 배제하고 효율과 생존만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닦아왔습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기능과 임무로 채워 ‘인간다움’이라는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차단한 존재였지요. 그러나 『파과』는 바로 그 배제의 틈바구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조용히 삶을 다시 묻기 시작합니다.

부서진 열매에서 피어나는 자각

‘파과(破果)’라는 단어는 깨진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 깨짐은 단순한 상처나 쇠락이 아니라, 삶이 어떤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의미합니다. 소설 속 조각은 이 ‘파과’의 시간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전성기의 ‘완벽한 킬러’가 아닙니다. 신체는 나약해졌고, 감각은 둔해졌으며, 무엇보다도 그간 견고하다고 믿었던 마음이 균열을 겪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부서짐 속에서 그녀의 인간다움이 다시금 피어나는 듯합니다.
낯선 강아지 ‘무용’에게 마음을 주고, 평범한 가정의 따뜻한 풍경에 호기심을 느끼며, 과거 피해자의 아들을 만나 과거와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과연 인간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어서, “지금이라도 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실존, 혹은 늦게 도착한 인간성

이 질문들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철학적 실존주의의 심장과 맞닿아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해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각은 그간 본질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녀의 삶은 ‘목적’이 아니라 ‘임무’로 가득했고, ‘의미’가 아니라 ‘생존’에 치중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걸어온 길은 얼핏 ‘비인간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한 ‘파과’의 순간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실존적 도약의 징후입니다.

노년의 ‘파과’는 더 이상 과거의 기능적 인간이 아닌, 본질을 찾기 위한 늦은 자각의 시간입니다.
그녀는 이제 ‘죽음’을 더 이상 ‘업’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처음으로 삶을 깊게 묻게 한 계기가 됩니다. 삶의 본질,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였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파과는 끝이 아닌 시작

『파과』는 단순한 범죄소설이나 액션 서사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편의 깊고 섬세한 철학적 서술입니다.
“얼마나 늦게라도 인간다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조각은 완벽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다움을 되묻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순수한 조건은 바로 이 ‘되묻는 행위’일지 모릅니다.

‘죽음을 업으로 삼은 자, 삶을 되묻다.’
그녀가 던지는 이 질문은 곧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언제부터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덧붙여, 이 질문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과 기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합니다.

인간다움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갱신하는 과정임을, 그리고 그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길임을 『파과』는 말해줍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노년의 킬러 조각이, 바로 그 ‘되묻기’의 행위로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다시 들려주는 셈입니다.
이 소설이 끝난 후에도, 그 질문들은 우리의 내면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