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를 처음 펼쳐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곧장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하나는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는 그의 집요함에 대한 존경심.
다른 하나는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계급 구조와 통제 사회의 면면에 대한 섬뜩한 이질감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에게 이상국가를 제시하며, 마치 완벽한 사회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 사회는 과연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일까
혹은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고도로 정제된 통제 사회일 뿐일까
그의 국가는 유토피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스토피아의 그림자도 짙게 깔려 있다.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 철인정치의 양면성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세 계층으로 나눈다.
지배자는 철학자, 수호자는 전사, 생산자는 농부와 장인이다.
이 가운데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개념은 ‘철인정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철학자는 진리를 아는 자이며, 그 진리를 기반으로 정의롭고 합리적인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명백한 전제가 숨어 있다.
일반 시민들은 진리와 정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권력은 소수의 철학자에게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엘리트주의의 철학적 버전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시민의 평등한 정치 참여와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결국 플라톤이 꿈꾼 국가는 철학자가 왕이 되는 고결한 이상이자, 동시에 다수의 무지함을 전제로 한 일종의 이성 독재일 수 있다.
가족 해체 공동 양육 통제된 감정의 사회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국가에서는 지배자와 수호자 계층이 사적인 가족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자녀는 공동으로 양육되며,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한다.
이러한 구조는 사적인 감정이 공적인 판단을 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과 유대감마저 제거하는 셈이다.
또한 플라톤은 예술과 문학에 대한 검열도 당연시한다.
당시 대중에게 인기 있던 호메로스의 서사시조차, 그 안에 담긴 신들의 부도덕함 때문에 교육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국민의 정서와 상상력을 통제한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한 자유 사회일까
예술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위로하는 통로인데, 이상국가에서는 그것조차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조정된다.
정의의 개념은 정당한가 혹은 억압의 도구인가
플라톤에게 정의란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농부는 농사를, 전사는 전투를, 지배자는 통치를 해야 하며, 각 계층은 자신의 위치를 넘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정의는 질서와 효율을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설득력이 있지만,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사실상 봉쇄한다.
이러한 정의는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구조는 오늘날의 가치 기준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회가 정체되고 개인의 꿈과 가능성이 억제된다면, 그 사회가 과연 진정 정의로운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따라온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고귀한 실험이었을까 위험한 모델이었을까
플라톤의 『국가』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금자탑이자, 정치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꿈꾸었고, 그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이상국가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곳은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개인의 삶이 국가에 종속된 냉정한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의 국가는 확실히 이상주의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때로 현실과 유리되어 인간의 다양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기울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의 이상국가는 우리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혹은 고도로 세련된 통제의 구조일 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나라에서 나는 정말 살아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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