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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과학 탐구

물은 정말 기억을 할까?

by Macan 2025. 4. 30.

동종요법, 파동, 그리고 과학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

한 컵의 물에 단 하나의 분자도 남지 않았는데,
치유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물의 기억력"이라 부르고,
다른 이는 "비과학적 망상"이라 일축한다.
그렇다면 진짜 과학은 이 논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1. 물이 기억을 한다는 주장, 어디서 시작됐을까?

1988년, 프랑스 면역학자 자크 벵베니스는
한 논문을 발표하며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의 실험에 따르면, 항체 분자가 사라질 정도로 희석된 물에서도
면역세포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즉, 물은 접촉했던 물질의 '기억'을 보존하고
그 정보로 생리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곧 동종요법(homeopathy)의 과학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동종요법은 특정 물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희석하여 투여하면서
그 잔상을 통해 몸이 스스로 치유를 시작하게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 논문은 곧 재현 불가 판정을 받으며
과학계에서 철저히 반박된다.

2. 물의 분자는 실제로 "기억"을 할 수 있을까?

물은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루어진 단순한 분자다.
그러나 이 단순함 속에 놀라운 유연성이 있다.
물 분자들은 서로 약한 수소 결합을 통해
매 순간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며 클러스터(무리)를 만든다.

그렇다면 물은 잠시나마 어떤 구조적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극도로 짧다.
그 구조는 길어야 수 피코초(1조 분의 1초)만에 무너진다.
따라서 생리학적 정보를 저장하거나
다시 방출할 만큼 '기억'을 유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학은 이 주장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한다.
“매혹적인 이야기지만, 증거는 없다.”

3. 물의 신비를 활용한 마케팅의 언어

“에너지 파동이 저장된 정화수”
“정보를 기억한 생명수”
이런 문구는 요즘 건강 보조 식품이나 워터 브랜드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양자역학’이나 ‘주파수’를 언급하며
물에 정보를 주입했다는 식의 마케팅을 한다.

하지만 실제 양자물리학자나 생화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을 “사이언스 픽션의 오용”이라고 말한다.
물은 정보를 저장하지 않고, 파동을 기억하지 않으며,
분자 수준에서 재현 가능한 신호를 유지할 수 없다.
즉, "물의 기억력"은 과학이라기보다 상상력의 영역이다.

4.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믿을까?

이런 이론은 단순한 사이비라기보다는
‘신비함’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반영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야 더욱 강력해 보이고,
희석될수록 더 정제되었다고 느껴진다.

플라시보 효과, 즉 믿음만으로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 또한
이 신념의 힘을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기억력은
과학적 근거는 약하지만
심리적·문화적 맥락에서는 꽤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5. 과학은 열린 질문을 허용하지만, 열린 주머니는 경계한다

과학은 항상 의심을 허용하고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재현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실험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물의 기억력’은 과학적 증명에 이르지 못했다.
정말 그렇다면, 그 물은
잊는 법만 배웠고 기억하는 법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