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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 역사 이야기

세종대왕은 진짜 완벽했을까?

by Macan 2025. 6. 3.

– 위인전 너머, 인간 이도(李祹)를 다시 보다

"성군, 천재, 언어 혁명가, 백성을 사랑한 왕."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의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완벽한 왕’이었을까요?
위인전이 숨긴 진짜 세종, 조금 더 인간적인 ‘이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 ‘완벽한 왕’ 프레임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세종은 지금처럼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신격화하는 분위기는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 정체성이 흔들리던 시기에 강화되었습니다.

📌 왜 세종대왕인가?

  • 한글 창제 → 문화적 자존심
  • 과학 기술 진흥 → 근대화 상징
  • 백성을 위하는 이미지 → 이상적인 군주상

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면서, 세종은 ‘국가 대표 위인’이 되었죠.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 알고 계셨나요? 세종대왕 퀴즈 타임

(블로그 체류시간 전략으로 본문 중간 배치)

Q1. 세종대왕은 과학에 밝았기 때문에 측우기·혼천의를 직접 설계했다?
→ ❌ NO! 대부분의 과학 발명은 장영실 등의 공신들이 주도했습니다. 세종은 지원자였지, 직접적인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Q2.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반대 없이 모든 백성을 교육시켰다?
→ ❌ NO! 훈민정음 창제 당시 집현전 학자 일부의 반대사대부들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글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천한 글자로 인식되었죠.


📜 세종의 그림자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흔적

1. 장남 문종의 건강, 끝내 외면하다

세종은 자신의 첫째 아들 문종이 병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왕위 계승을 강행했습니다. 결국 문종은 1년 2개월 만에 사망. 이후 단종 → 수양대군(세조)로 이어지는 조선 최대의 왕권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백성을 위한 통치자였지만, 아들의 고통은 지나치게 의지로 밀어붙였다.” – 사학자들의 시선


2. 자식 사랑은 있었지만, 유별났다?

세종은 아들들에게 한글 창제의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신뢰했지만,
반대로 딸들에게는 거의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여성을 '기록할 만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던 조선 유교사회의 단면이기도 하죠.

 

3. 과로사 직전까지 일하다, 결국 건강 악화

세종은 말년에는 당뇨와 피부병, 시력 저하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왕권과 국정 운영을 끝까지 직접 통제하며 참다 참다, 결국 장기 집무 중단 상태에 빠졌고… 정치는 사실상 수양대군이 대리하게 됩니다.
즉, ‘유능한 군주’라는 이미지와 달리 후계 구도와 정치적 통제력의 허점도 있었던 것이죠.


🔎 역사란, 사람을 입체적으로 보는 작업입니다

세종은 분명 위대한 왕입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실수와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는 인간적인 기록에서 비롯됩니다.
완벽함보다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실수하고, 고통받는 군주였기에 더 진실하게 다가옵니다.


💬 마무리하며: 오늘날의 리더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세종이 오늘날에 있었다면, 과로로 기사에 실렸을 수도 있고, 내부 비판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실험정신을 가졌으며, 백성과의 소통을 위해 '틀'을 깬 리더였다는 사실이죠.
‘완벽함’보다는 ‘진심과 실행력’—그것이 세종의 진짜 위대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