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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과학 탐구

물건에도 기억이 있을까? - '재료의 기억'에 관한 과학

by Macan 2025.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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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이를 한 번 접으면 그 자국이 남는다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깁니다. 금속을 구부렸다가 펴도 완벽히 원상복구되지 않고, 오래 사용한 컵은 손에 익은 감촉을 남기죠. 그런데 이건 단순한 마모나 손상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물건 자체가 '기억'을 하고 있는 걸까요?


📎 종이는 왜 접힌 자국을 '기억'할까?

종이를 접으면 표면 섬유가 늘어나거나 끊어지고, 그 주변은 미세한 변형을 겪습니다. 이 미세한 변화는 다시 펴도 사라지지 않죠. 물리적으로 보면 이건 ‘영구 변형(permanent deformation)’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선을 넓히면, 이는 종이라는 재료가 외부 자극에 대한 ‘기억 흔적’을 남긴 셈입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플라스틱, 천, 금속 등 다양한 재료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매일 쓰는 물건들, 어쩌면 하나하나가 우리가 남긴 ‘기억’을 품고 있는 셈입니다.


🧲 형상기억합금: 진짜로 기억하는 금속

단순한 ‘흔적’ 그 이상을 보여주는 재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형상기억합금(Shape Memory Alloy, SMA)입니다.

이 재료는 한 번 설정된 형태를 ‘기억’했다가, 열을 가하면 원래 형태로 되돌아갑니다. 니켈-티타늄(NiTi) 합금이 가장 널리 쓰이며, 치아교정기, 항공우주 부품, 심지어 로봇 관절에도 활용됩니다. 아이폰 프레임에도 사용된 바 있죠.

이러한 재료는 원자 구조가 온도에 따라 바뀌는 상전이(phase transformation)를 통해 형태를 기억합니다. 단순한 마모나 변화가 아니라,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분자 구조 수준에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 유리는 왜 ‘잊지 못하는’ 재료일까?

흥미로운 점은, 유리는 이와 정반대의 예시를 보여줍니다. 유리는 ‘고체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해 고체도 액체도 아닌 비결정성 고체(amorphous solid)’입니다.

수천 년 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 아래가 두꺼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유리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흘러내리는 성질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다만 과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

이런 유리의 특성은 물리적으로 매우 안정돼 보이지만,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는 아주 느린 변화와 기억의 지연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위상학적 기억: ‘형태’는 바뀌어도 ‘본질’은 남는다?

최근 재료과학과 수학이 만나는 접점으로 주목받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위상물질(Topological Materials)입니다.

이 물질들은 외부 자극(압력, 열 등)이 가해져도 전자 구조의 본질이 바뀌지 않습니다. 즉, 겉으로는 변해도 내부 정보는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이죠. 일종의 물리적 '기억 내성'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이 기술은 미래의 양자 컴퓨터나 손상에 강한 전자기기에 응용될 수 있어, 현재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 결국, 기억은 생명체만의 특권이 아니다?

우리는 기억을 뇌와 연결된 인지활동으로만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재료과학은 말합니다:
기억은 정보의 저장과 재현이라면, 물질도 얼마든지 ‘기억’을 가질 수 있다.

종이의 자국에서부터 형상기억합금, 위상물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손에 쥐는 모든 물건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겪은 ‘이력’을 품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물건들은 스스로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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